피터 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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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터 폰다는 미국의 배우, 감독, 각본가, 프로듀서이다. 헨리 폰다의 아들이자 제인 폰다의 동생으로, 1960년대 반문화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로 활동했다. 영화 《이지 라이더》(1969)의 제작, 각본, 주연을 맡아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1997년 영화 《율리스 골드》로 골든 글로브 드라마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2019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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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폰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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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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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피터 헨리 폰다 |
출생일 | 1940년 2월 23일 |
출생지 | 뉴욕 주 뉴욕 시 |
사망일 | 2019년 8월 16일 |
사망지 |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
직업 | 배우 |
활동 기간 | 1960년 – 2019년 |
가족 | |
아버지 | 헨리 폰다 |
어머니 | 프랜시스 포드 시모어 |
자녀 | 브리짓 폰다 포함 2명 |
친척 | 제인 폰다 (누나), 트로이 개리티 (조카) |
결혼 | |
배우자 | 수잔 제인 브루어 (1961년–1974년, 이혼) 포르티아 레베카 크로켓 (1975년–2011년, 이혼) 마거릿 드보겔라에 (2011년) |
학력 | |
모교 | 네브래스카 대학교 오마하 |
수상 | |
골든 글로브상 | 영화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 1997년 목마른 태양 시리즈, 미니시리즈, 텔레비전 영화 부문 남우조연상 2000년 《The Passion of Ayn Rand》 |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 남우주연상 1997년 목마른 태양 |
대표 작품 | |
주요 작품 | 이지 라이더 (1969년) 목마른 태양 (1997년) |
2. 초기 생애
대학 졸업 후 브로드웨이를 거쳐 1963년 영화계에 데뷔한 폰다는 초기 이미지를 벗어나 로저 코먼 감독의 와일드 엔젤스 (1966) 등을 통해 반문화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1969년 제작, 공동 각본, 주연을 맡은 이지 라이더의 대성공으로 뉴 할리우드의 기수가 되었으며, 이후 직접 영화를 감독하거나(방랑의 카우보이, 아이디호 트랜스퍼) 다양한 장르의 영화(더티 메리, 크레이지 래리 등)에 출연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폰다는 배우 헨리 폰다와 사교계 명사 프랜시스 포드 시모어 사이에서 1940년 2월 23일 뉴욕 시의 르로이 병원에서 제왕 절개로 태어났다. 누나는 배우 제인 폰다이며,[3][4] 어머니의 첫 결혼에서 태어난 이부 자매 프랜시스 드 빌레르 브로카우(1931–2008)도 있었다. 피터가 열 살 때 어머니는 정신 병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그는 15살이 되어서야 어머니 죽음의 정확한 경위와 장소를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 겪은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은 아버지 헨리 폰다와의 관계에 평생 영향을 미치는 불화의 씨앗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11번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실수로 자신의 복부에 총을 쏘아 생명이 위독했던 적이 있다. 회복을 위해 인도 나이니다르의 산악 휴양지에서 몇 달간 머물렀다.[5] 몇 년 후,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과 함께 LSD를 복용한 그는 이 사건을 언급하며 "나는 죽는다는 것이 어떤 건지 알아"라고 말했다. 이는 비틀즈의 노래 "She Said She Said"의 영감이 되었다.[6]
피터는 매사추세츠주 사우스보로에 있는 페이 스쿨을 1954년에 졸업하고, 코네티컷주 심즈버리에 위치한 웨스트민스터 스쿨에 진학하여 1958년에 졸업했다.[7]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아버지의 고향인 네브래스카주 오마하로 가서 연기를 공부했다. 오마하 네브래스카 대학교에 다니면서 지역 극단인 오마하 커뮤니티 플레이하우스에 참여하며 연기 활동을 시작했다.
3. 경력
1997년 영화 빛 속에서에서 노년의 양봉가 역으로 골든 글로브상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연기력을 다시 인정받았다. 만년까지 텔레비전과 영화를 오가며 배우, 제작자, 각본가,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아버지 헨리 폰다, 누나 제인 폰다, 딸 브리짓 폰다와 각각 영화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평생 할리우드의 상업주의에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몬태나 주에서 조용히 생활했다.
2019년 8월 16일,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폐암으로 인한 호흡 부전으로 사망했다.[54]
3. 1. 초기 활동 및 영화
폰다는 대학 졸업 후 뉴욕으로 돌아와 1960년 세실우드 극단에 합류하며 연기 활동을 시작했다.[8] 곧 브로드웨이에 진출하여 제임스와 윌리엄 골드만이 쓴 연극 ''피, 땀, 그리고 스탠리 풀'' (1961)에 출연해 주목받았다. 이 시기 ''네이키드 시티'', ''더 뉴 브리드'', ''왜건 트레인'', ''디펜더스'' 등 다수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게스트로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다.
그의 영화 데뷔는 1963년 로스 헌터가 제작하고 샌드라 디와 호흡을 맞춘 로맨틱 코미디 ''태미 앤 더 닥터''였다. 이 영화는 준수한 흥행을 기록했다.[9] 같은 해 칼 포먼 감독의 전쟁 영화 ''더 빅터스''에서는 조연으로 출연하여[10] 골든 글로브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채닝'', ''체포와 재판'', ''알프레드 히치콕 시간'', ''12시 정각'' 등 TV 활동을 이어갔고, 로버트 로슨 감독의 영화 ''릴리스'' (1964)에서는 워렌 비티, 진 세버그, 진 해크먼 등과 함께 출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사무엘 골드윈 주니어가 감독한 ''영 러버스'' (1964)에서는 주연을 맡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자살과 아버지 헨리 폰다와의 불화는 그의 삶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그는 초기에 주로 맡았던 청순하고 반듯한 청년 역할에 만족하지 못했고, 할리우드의 상업주의에 대한 반감을 키워갔다. 이러한 내적 갈등 속에서 약물에 의존하기도 했다. 그의 반항적인 모습에 주목한 저예산 영화의 대부 로저 코먼은 1966년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픽처스(AIP)에서 제작한 영화 ''와일드 엔젤스'' (The Wild Angels)의 주연으로 그를 발탁했다. 실존하는 폭주족 집단 헬스 엔젤스를 소재로 한 이 영화는 낸시 시나트라, 브루스 던과 함께 출연했으며, 개봉 초기 서부 해안 지역을 시작으로 점차 전국적인 흥행에 성공했다.
1967년에는 LSD 경험을 다룬 영화 ''트립'' (The Trip)에 출연하며 데니스 호퍼, 잭 니콜슨과 인연을 맺었다. 이 만남은 이후 뉴 할리우드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인 ''이지 라이더'' (Easy Rider)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 후반, 미국 영화계에 뉴 할리우드 (아메리칸 뉴 시네마) 바람이 불면서 폰다는 직접 영화 제작사를 설립하고 저예산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1969년 그가 제작, 공동 각본, 주연을 맡은 ''이지 라이더''는 독립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성공을 거두며 컬트적인 지지를 받았다. 당시 미국의 반문화 정서와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을 상징적으로 담아낸 이 영화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와 함께 뉴 할리우드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으며, 폰다를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기수로 만들었다.
''이지 라이더''의 성공 이후 폰다는 1971년 자신이 직접 감독하고 주연한 서부극 ''방랑의 카우보이'' (The Hired Hand)를 선보였고, 1973년에는 SF 영화 ''아이디호 트랜스퍼'' (Idaho Transfer)에 출연했다. 1974년에는 로드 액션 영화 ''더티 메리, 크레이지 래리'' (Dirty Mary, Crazy Larry)에 출연하며 꾸준히 활동을 이어갔다.
3. 2. 반문화 아이콘과 로저 코먼
1960년대 중반, 피터 폰다는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주연 배우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잡지 ''플레이보이''에 따르면 그는 "낙오자로서의 탄탄한 명성"을 쌓고 있었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정기적으로 LSD를 사용하는 등 외적으로 비순응적인 태도를 보이며 "기성" 영화 산업과 거리를 두었고, 자연스럽게 연기 일자리도 줄어들었다.[13]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자살로 인해 아버지 헨리 폰다와 불화를 겪으며 생긴 상처를 안고 있었고, 대학 졸업 후 브로드웨이를 거쳐 1963년 『태미와 닥터』로 영화에 데뷔하여 청순하고 곧은 청년 이미지로 인기를 얻었으나, 상업주의 영화와 자신이 생각하는 배우상과 다른 엘리트 역할에 염증을 느끼며 약물에 의존하게 되었다.
밴드 The Byrds 멤버들과의 친분을 통해 1965년 8월 로스앤젤레스 베네딕트 캐년에 있는 비틀즈의 임대 주택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존 레논, 링고 스타, 조지 해리슨과 함께 LSD의 영향을 받고 있던 중, 폰다가 "나는 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아."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레논이 듣게 되었다. 레논은 이 말을 나중에 비틀즈의 1966년 앨범 ''리볼버''에 수록된 곡 "She Said She Said"의 가사에 사용했다.[6]
1966년 8월, 폰다는 대마초 소지 혐의로 기소되었으나[14] 그해 12월 무죄 판결을 받았다.[15] 같은 해 11월에는 경찰이 강제로 해산시킨 선셋 스트립 폭동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당시 버팔로 스프링필드가 그들의 노래 "For What It's Worth"에서 경찰의 과잉 대응을 비판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폰다의 반항적인 모습에 흥미를 느낀 로저 코먼은 1966년 자신이 이끄는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픽처스(AIP)에서 제작한 저예산 영화 ''와일드 엔젤스(The Wild Angels)''에 그를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이 영화는 실존하는 바이커 갱단 헬스 엔젤스의 생태를 그린 작품으로, 원래 조지 차키리스가 주연으로 내정되었으나 오토바이를 탈 줄 모른다는 이유로 폰다에게 역할이 돌아갔다. 영화에서 폰다는 죽은 동료 바이커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읊는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고, 낸시 시나트라, 브루스 던 등과 함께 출연했다. ''와일드 엔젤스''는 처음에는 서부 해안에서만 상영되었으나 점차 미국 전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베니스 영화제에도 초청되었다. 이 영화는 소위 '바이커 영화' 장르의 시작을 알렸으며, 피터 폰다를 반문화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한편, 폰다는 1965년 12월에 촬영된 텔레비전 파일럿 ''High Noon: The Clock Strikes Noon Again''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는 게리 쿠퍼 주연의 고전 서부극 ''하이 눈'' (1952)을 리메이크한 것으로, 폰다가 직접 쿠퍼의 역할을 맡았으나 정규 시리즈로 제작되지는 못했다.[17] 1967년에는 휴 마세켈라가 프로듀싱하고 그람 파슨스가 쓴 곡 "November Night"를 싱글로 녹음하기도 했다. (B면은 도노반의 "Catch the Wind")[16]
1967년, 폰다는 로저 코먼과 다시 손잡고 영화 ''더 트립''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잭 니콜슨이 각본을 쓴 이 영화는 LSD 복용 경험과 그 영향을 다루었으며, 수잔 스트라스버그(액터스 스튜디오 창시자 리 스트라스버그의 딸), 브루스 던, 데니스 호퍼 등이 함께 출연했다. 이 영화 역시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며,[18] 이 작품을 통해 폰다는 데니스 호퍼, 잭 니콜슨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고, 이는 이후 세 사람이 함께 만들게 될 기념비적인 영화 ''이지 라이더''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폰다는 프랑스로 건너가 옴니버스 영화 형식의 공포 영화 ''죽음의 유령'' (1968) 중 한 에피소드에 출연했다. 이 에피소드는 당시 그의 누나 제인 폰다의 남편이었던 로제 바딤이 연출했으며, 제인 폰다와 함께 출연했다. 미국 텔레비전에서는 로드 설링이 각본을 쓰고 밴 헤플린과 함께 출연한 TV 영화 ''어떤 존경할 만한 사람들'' (1968)에 출연하기도 했다.[19]
3. 3. 《이지 라이더》
폰다는 데니스 호퍼가 감독한 1969년 영화 ''이지 라이더''의 제작, 공동 각본, 주연을 맡으며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기수로 떠올랐다. 이 영화는 1960년대 후반 반문화의 상징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지 라이더''는 장발의 오토바이 폭주족 두 명(와이어트와 빌리)이 미국 남서부와 남부를 오토바이로 여행하면서 당시 미국 사회의 편협함과 폭력에 직면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폰다는 뒷면에 커다란 미국 국기가 그려진 가죽 재킷을 입고 할리데이비슨 초퍼 "캡틴 아메리카"를 타는, 카리스마 있지만 과묵한 주인공 "와이어트"[21] 역을 연기했다. 데니스 호퍼는 수다스러운 동료 "빌리" 역을 맡았고, 잭 니콜슨은 우연히 만나 그들과 동행하게 되는 알코올 중독 변호사 "조지 핸슨" 역으로 출연하여 강한 인상을 남겼다. 폰다는 테리 서던, 감독인 호퍼와 함께 각본을 공동으로 집필했다.
이 영화의 구상은 폰다가 로저 코먼이 제작한 저예산 영화 ''와일드 엔젤스'' (1966)의 성공과, 이듬해 ''백주몽'' (1967)에서 데니스 호퍼, 잭 니콜슨과 만나 의기투합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폰다는 처음에 ''와일드 엔젤스''와 ''트립''을 제작했던 로저 코먼과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픽처스(AIP)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으려 했지만, 그들은 경험이 부족한 호퍼가 감독을 맡는 것을 꺼려 투자를 망설였다. 결국, 폰다는 컬럼비아 픽처스로부터 약 36만달러의 비교적 적은 예산을 확보하여 영화를 제작했다.[22] 이는 폰다가 코먼의 ''와일드 엔젤스'' 제작 예산을 염두에 둔 금액이었다. 호퍼 감독은 거의 모든 장면을 실제 장소에서 촬영하며 현장감을 살렸다.
영화 음악 역시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더 밴드의 기타리스트 로비 로버트슨은 시사회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영화 전체의 음악 작곡을 제안했지만, 폰다는 이미 완성된 장면에 맞는 곡들을 선호하여 이를 거절했다. 대신 스테픈울프의 "본 투 비 와일드", 밥 딜런의 곡을 더 버즈의 로저 맥귄이 부른 "잇츠 올 라이트, 마 (아임 온리 블리딩)", 그리고 더 밴드가 연주한 로버트슨의 곡 "더 웨이트" 등 당대의 상징적인 록 음악들을 사용하여 영화의 분위기와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이지 라이더''는 개봉 후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며 4000만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아카데미상에서는 잭 니콜슨이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폰다, 호퍼, 서던은 각본상 후보에 오르는 등 비평적으로도 인정받았다. ''이지 라이더''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와 함께 아메리칸 뉴 시네마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했으며, 폰다는 이 영화를 통해 시대의 아이콘이자 새로운 영화 흐름을 이끄는 인물로 부상했다. 한편, 영화의 동료였던 데니스 호퍼는 이후 정치적으로 공화당 지지자가 되었다.
3. 4. 감독 및 액션 스타
이지 라이더의 성공 이후, 폰다는 서부극 영화 《고용된 손》(1971)을 감독하고 출연했다. 그는 워렌 오츠, 베르나 블룸, 비트 세대 시인 마이클 맥클루어 등이 출연하는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이 영화는 비평가들의 엇갈린 평가를 받았고 초 개봉 당시 상업적으로 실패했지만, 여러 해가 지난 2001년에 완전히 복원된 버전이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같은 해 선댄스 채널에서 DVD로 두 개의 별도 에디션으로 재개봉되었다. 폰다는 이후 SF 영화 《아이다호 트랜스퍼》(1973)를 연출했다. 그는 이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고, 이 영화는 제한적인 개봉 이후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영화 《투 피플》(1973)에 린제이 와그너와 함께 출연하여 베트남 전쟁 탈영병을 연기했다.
폰다는 수잔 조지와 오랜 친구이자 자주 함께 출연했던 아담 로크와 함께 영화 《더티 메리, 크레이지 래리》(1974)에 출연했는데, 이 영화는 대규모 자동차 경주에 뛰어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슈퍼마켓 강도를 저지르는 두 명의 나스카 유망주에 관한 영화였다. 이 영화는 그 해 흥행에 성공했다. 이것은 폰다가 일련의 액션 영화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윌리엄 홀든과 함께한 《오픈 시즌》(1974); 워렌 오츠와 함께 악마 숭배자들을 피해 도망가는 《레이스 위드 데빌》(1975) (또 다른 히트작);[24] 작가 겸 감독 토머스 맥구에인과 함께한 《92 인 더 셰이드》(1975) (오츠와 다시 출연); 발 게스트 감독의 《킬러 포스》(1976); AIP가 자금을 지원한 《퓨처월드》(1976), 《웨스트월드》(1973)의 속편;[25] 조나단 데미가 감독하고 로저 코먼과 다시 만난 《파이팅 매드》(1976).[26]
《아웃로 블루스》(1977)는 폰다가 수잔 세인트 제임스와 함께 음악가를 연기한 드라마였다. 《하이-볼린'》(1978)으로 몇 편의 액션을 더 한 후, 폰다는 논란이 많은 드라마 《완다 네바다》(1979)를 연출하며 감독으로 복귀했는데, 여기서 39세의 폰다는 당시 13세였던 브룩 쉴즈의 "사랑" 대상으로 출연했다. 그의 아버지인 헨리 폰다도 잠깐 출연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함께 출연한 유일한 영화이다.[27]
3. 5. 1980년대와 1990년대
폰다는 앨리스터 맥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텔레비전 영화 인질 타워(1980)에서 주연을 맡았다. 이후 흥행작 캐논볼(1981)에서는 자신의 초기 오토바이 영화를 패러디한 "최고의 바이커" 역할로 출연했다. 또한 제임스 우즈, 카렌 앨런, 브라이언 데니히 등 탄탄한 출연진과 함께한 영화 스플릿 이미지(1982)에서는 카리스마 있는 사이비 종교 지도자를 연기했다. 이 영화는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1980년대에 폰다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꾸준히 출연했다. 일본에서 촬영한 내 친구, 괜찮아(1983)와 난쟁이의 춤(1983), 독일에서 촬영한 페퍼민트 피스(1983), 올리버 리드와 함께한 캐나다 공포 영화 경련(1983), 텔레비전 영화 살아야 할 이유(1985), 테이텀 오닐과 공연한 확신에 찬 분노(1985), 용병 파이터스(1988), 서부극 호켄의 종족(1988), 사운드(1988), 리브 울만과 함께한 무관심한 사람들(1989), 장미 정원(1989) 등이 있다.
1990년대 초, 폰다는 자신이 주연을 맡은 영화 적(1990)의 각본 작업에도 참여했다. 패밀리 익스프레스(1991)와 사우스 비치(1993)에서 주연을 맡았으나, 이후 다수의 독립 영화에서는 조연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크리스토퍼 코폴라 감독의 데드폴(1993), 딸 브리짓이 출연한 보디스, 레스트 & 모션(1993), 프란시스 피셔와 나타샤 그렉슨이 출연한 몰리 & 지나(1994), 르네 젤위거와 함께한 러브 앤드 어 .45(1994), 데이비드 린치가 제작한 나드자(1994) 등이 대표적이다. 존 카펜터 감독의 LA 탈출(1996)에서도 인상적인 조연 연기를 선보였으며, 돌아보지 마(1996)에도 출연했다. 또한 TV 시리즈 밤의 열기 속에서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오랜 기간 다양한 작품 활동을 이어온 폰다는 율리스 골드(1997)에서의 연기로 다시 한번 큰 주목을 받으며 높은 평가와 보편적인 찬사를 얻었다. 이 영화에서 그는 마약 중독에 빠진 아들과 손녀를 구하려는 과묵한 플로리다 북부의 양봉가이자 베트남 참전 용사를 깊이 있게 연기하여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같은 해 페인티드 히어로(1997)에서도 주연을 맡았다.
1998년에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일부 각색한 TV 영화 템페스트에 출연했다. 잭 벤더가 감독한 이 영화에는 폰다 외에 존 글로버, 해럴드 페리뉴, 캐서린 헤이글 등이 출연했다. 같은 해 아인 랜드의 열정에서는 프랭크 오코너 역을 연기하여 2000년에 골든 글로브상 미니시리즈/텔레비전 영화 부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듬해인 1999년에는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범죄 영화 라임이에서 자신의 젊은 여자친구를 실수로 죽인 나이 든 록 음악 프로듀서 테리 발렌타인 역을 맡아 호평받았다.
폰다는 1998년에 자서전 Don't Tell Dad|아버지께는 말씀하지 마세요eng를 출간했다. 1990년대에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광고에도 출연했다. 1997년 율리스 골드에서의 연기로 골든 글로브상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도 노미네이트되었으나 수상에는 실패했다. 당시 수상자는 이지 라이더에서 함께 했던 잭 니콜슨(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이었으며, 니콜슨은 수상 소감에서 폰다를 "옛 오토바이 친구"라고 언급하며 경의를 표했다.
3. 6. 2000년대 이후
2000년대 폰다의 작품으로는 ''사우스 오브 헤븐, 웨스트 오브 헬(South of Heaven, West of Hell)'' (2000), ''세컨드 스킨''(Second Skin) (2000), ''토마스와 마법 기차''(Thomas and the Magic Railroad) (2000), ''울리 보이즈''(Wooly Boys) (2001), ''라라미 프로젝트(The Laramie Project)'' (2001), ''말도나도 미라클''(The Maldonado Miracle) (2003), ''캐피탈 시티''(Capital City) (2004), ''가장 기만적인 것은 마음이다''(The Heart Is Deceitful Above All Things) (2004), ''시간의 도둑''(A Thief of Time) (2004), ''우리가 어른이었을 때''(Back When We Were Grownups) (2004), ''슈퍼노바(Supernova)'' (2005), ''엘 코브라더: 인 갓 위 트러스트''(El cobrador: In God We Trust) (2006) 등에 출연했다.
2002년 폰다는 AMA(American Motorcyclist Association) 모터사이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4년에는 역대 최고 판매 비디오 게임 중 하나인 ''그랜드 테프트 오토: 산 안드레아스''(Grand Theft Auto: San Andreas)에서 나이든 히피 마약 재배자 "진실"(The Truth)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2007년 인터뷰에서 폰다는 오토바이를 타는 것이 집중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나는 MV 아구스타(MV Agusta)를 탄다. 이탈리아 레이싱 오토바이지. 집중력을 강요하지. 집중해야 하는데, 내 인생, 이 사업에서는 집중하기가 가끔 어렵지. 그래서 집중을 강요해야 하고, 그게 아주 좋아. 오토바이는 나를 자유로운 길로 이끌어. 내가 타는 길에는 울타리가 없고, 고속도로는 안 타. 그게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야, 왜냐하면 이 작은 크리스찬 소년에게는 더 많은 땅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건 사실이 아니야. 나는 무신론자지만, 어쨌든.[35]
폰다는 현상금 사냥꾼 바이런 맥엘로이 역으로 3:10 투 유마(3:10 to Yuma) (2007)에서 1957년 서부 영화를 리메이크하며 스크린에 복귀했다. 그는 크리스찬 베일과 러셀 크로우와 함께 출연했다. 이 영화는 두 개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고 평론가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는 또한 바이커 코미디 영화 ''와일드 혹스''(Wild Hogs)의 마지막 장면에서 바이커 갱 델 푸에고스의 창립자이자 레이 리오타가 연기한 잭의 아버지인 데미안 블레이드 역으로 출연했다. 폰다는 또한 영화 ''고스트 라이더(Ghost Rider)'' (2007)에서 두 명의 주요 악당 중 한 명인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를 연기했다. 그는 속편(Ghost Rider: Spirit of Vengeance)에서 이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어했지만 키아란 힌즈로 대체되었다.
그는 ''지구 속 여행(Journey to the Center of the Earth)'' (2008), ''일본(Japan)'' (2008), ''더 퍼펙트 에이지 오브 록 앤 롤''(The Perfect Age of Rock 'n' Roll) (2009)에 출연했으며, ''더 부다 독 세인츠 2: 올 세인츠 데이''(The Boondock Saints II: All Saints Day) (2009)에서 주요 악당 "더 로만"(The Roman) 역을 맡았는데, 이 영화는 ''더 부다 독 세인츠''(The Boondock Saints)의 속편이다. 폰다는 텔레비전 시리즈 ''캘리포니케이션(Californication)''에도 출연했다.
폰다는 후기에 《아메리칸 밴디츠: 프랭크와 제시 제임스》(2010, 프레드 올렌 레이 연출), 《더 트러블 위드 블리스》(2011), 《CSI: NY》 에피소드, 《스미티》(2012), 《하로딤》(2012), 《애즈 쿨 애즈 아이 엠》(2013), 《카퍼헤드》(2013), 《얼티메이트 라이프》(2013), 《더 하비스트》(2013), 《HR》(2014), 《하우스 오브 바디스》(2014), 《제시 제임스: 로우맨》(2015), 니콜라스 케이지와 함께 출연한 《더 러너》(2015), 《더 발라드 오브 레프티 브라운》(2017), 《아메리카에서 가장 혐오받는 여성》(2017), 《보더랜드》(2017), 《유 캔트 세이 노》(2018), 그리고 크리스토퍼 플러머와 함께 출연한 《바운더리스》(2018) 등에 출연했다. 그는 다큐멘터리 영화 《더 빅 픽스》(2012)의 총괄 프로듀서였다.
그의 마지막 출연작은 베트남 전쟁 영화 《더 라스트 풀 메저》였으며, 연출을 맡은 토드 로빈슨은 피터 폰다가 사망하기 전에 이 영화를 전부 감상했고, 영화를 보면서 감동했다고 전했다.[36]
2019년 8월 16일, 캘리포니아 주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폐암으로 인한 호흡 부전으로 사망했다.[54]
4. 사생활
폰다는 세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수잔 브루어로 1961년에 결혼하여 브리짓, 저스틴, 토마스 세 자녀를 두었으나 1974년 이혼했다.[38] 1975년 포르티아 레베카 크로켓과 두 번째 결혼을 했고, 이 결혼은 36년 후인 2011년 이혼으로 끝났다.[38] 같은 해 마가렛 데보겔라에르와 세 번째 결혼을 했으며, 2019년 폰다가 사망할 때까지 8년간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38]
배우자 | 결혼 기간 | 자녀 | 비고 |
---|---|---|---|
수잔 브루어 | 1961년 ~ 1974년 (13년) | 브리짓 폰다, 저스틴 폰다, 토마스 폰다 | 이혼[38] |
포르티아 레베카 크로켓 | 1975년 ~ 2011년 (36년) | 없음 | 이혼[38] |
마가렛 데보겔라에르 | 2011년 ~ 2019년 (8년) | 없음 | 폰다 사망 시까지 유지[38] |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자살 이후 아버지 헨리 폰다와 불화를 겪으며 평생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헨리와는 1979년 자신이 감독한 영화 ''그랜드 캐니언의 황금''에서 함께 출연했다. 누나 제인 폰다와는 1967년 옴니버스 유럽 영화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이야기''에, 딸 브리짓과는 1993년 ''러브 어페어''에 함께 출연했다.
취미는 오토바이로, 젊은 시절에는 직접 오토바이를 만들기도 했다. 영화 《이지 라이더》에서는 할리데이비슨을 탔다. 일본 오토바이 중에서는 북미, 유럽 모델의 1000cc 오토바이만 선호한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스위스 시계 스와치의 수집가이기도 하다.
만년에는 "화려한 할리우드 혐오"를 유지하며 몬태나 주의 시골에서 조용히 살았다. 2000년에는 캘리포니아주 팜스프링스의 팜스프링스 워크 오브 스타에 골든 팜 스타가 헌정되었다.[37]
2019년 8월 16일,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폐암으로 인한 호흡 부전으로 사망했다.[54]
4. 1. 정치적 견해
그는 1960년대부터 일관된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했다.[55]2011년, 폰다는 팀 로빈스와 함께 다큐멘터리 영화 ''더 빅 픽스''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딥워터 호라이즌 원유 유출 사고에서 BP의 역할과 멕시코만에 미친 영향을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칸 영화제 기자 회견에서 폰다는 해당 원유 유출 사고와 관련하여 당시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에게 편지를 썼다고 밝혔다. 그는 오바마가 "외국 군화(BP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임)가 우리나라 땅을 밟아 우리 군대, 즉 미국 해안 경비대에게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를 지시하고, 미국 시민인 우리에게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를 말하도록 허용한" 것에 대해 "빌어먹을 배신자"라고 비난했다.[39] 배우 팀 로빈스는 수전 서랜든 등과 함께 할리우드 내에서 대표적인 진보 성향 배우로 알려져 있다.[55]
2018년 6월, 폰다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한 이민 정책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당시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이 추진한 정책으로 인해 멕시코 국경에서 이민자 부모와 아이들이 강제로 격리되는 상황에 대해 그는 "우리는 배런 트럼프를 영부인 멜라니아 트럼프의 품에서 떼어내 소아성애자들과 함께 감옥에 가둬야 한다"고 주장했다.[40] 또한, 그는 미국 시민들이 미국 이민관세청(ICE) 요원들의 신상을 파악하여 그들의 집과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 앞에서 항의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41] 이 트윗으로 인해 미국 비밀 경호국은 트럼프 가족의 신고를 받고 조사에 착수했다.[40] 당시 백악관 대변인이었던 사라 허커비 샌더스 역시 폰다의 비판 대상이 되었는데, 그는 "어쩌면 그녀(샌더스)의 아이들을 빼앗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트윗을 올렸다.[42]
이후 삭제된 다른 트윗에서는 미국 국토안보부 장관이었던 커스틴 닐슨을 저속한 표현으로 비난하며 그녀를 "감옥에 가두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찌르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2]
폰다는 배런 트럼프에 대한 트윗을 삭제했다면서 "즉시 후회했고, 내가 말한 말과 그로 인해 야기된 모든 상처에 대해 가족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했다.[40][43] 폰다의 트윗에 대한 반발로 그의 최신 영화 ''바운더리스''와 다른 소니 픽처스 프로젝트에 대한 보이콧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44][45] 소니 픽처스는 2018년 6월 22일 예정대로 ''바운더리스''를 개봉했지만,[46] 폰다의 발언에 대해 "혐오스럽고 무모하며 위험하며, 우리는 이를 전적으로 규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47]

5. 사망
폰다는 2019년 8월 16일, 폐암으로 인한 호흡 부전으로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8][49]
폰다의 사망 후, 그의 누나인 제인 폰다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저는 매우 슬픕니다. 그는 제 다정하고 귀여운 남동생이었고, 가족 내에서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 그와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웃으면서 떠났습니다."[50][51]
6. 수상 및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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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 연도 | 부문 | 작품 | 결과 |
---|---|---|---|---|
아카데미상 | 1969 | 최우수 오리지널 각본상 | 이지 라이더 | 후보 |
1997 | 남우주연상 | 율리스 골드 | 후보 | |
브라보 오토 | 1971 | 남우주연상 | 이지 라이더 | 후보 |
시카고 영화 비평가 협회 | 1998 | 남우주연상 | 율리스 골드 | 후보 |
댈러스-포트워스 영화 비평가 협회 | 1997 | 남우주연상 | 수상 | |
데이타임 에미상 | 2004 | 아동 프로그램 부문 최우수 연기상 | The Maldonado Miracle | 후보 |
골든 글로브상 | 1964 | 올해의 신인상 - 배우 | 더 빅터스 | 후보 |
1997 | 영화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52] | 율리스 골드 | 수상 | |
1999 | 미니시리즈 또는 TV 영화 부문 남우주연상 | 더 템페스트 | 후보 | |
1999 | 미니시리즈 또는 TV 영화 부문 남우조연상 | 아인 랜드의 정열 | 수상 | |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 | 1998 | 남우주연상 | 율리스 골드 | 후보 |
전미 영화 비평가 협회 | 1998 | 남우주연상 | 후보 | |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 | 1997 | 남우주연상 | 수상 | |
뉴욕 드라마 비평가 협회상 | 1962 | 신인 배우상 | 블러드, 스웨트 앤 스탠리 풀 | 수상 |
프라임타임 에미상 | 1999 | 미니시리즈 또는 영화 부문 남우조연상 | 아인 랜드의 정열 | 후보 |
미국 배우 조합상 | 1998 | 영화 부문 남우주연상 | 율리스 골드 | 후보 |
1999 | 미니시리즈 또는 TV 영화 부문 남우주연상 | 아인 랜드의 정열 | 후보 | |
2007 | 영화 부문 앙상블 연기상 | 3:10 투 유마 | 후보 | |
씨어터 월드 어워드[53] | 1962 | 신인 배우상 | 블러드, 스웨트 앤 스탠리 풀 | 수상 |
미국 작가 조합상 | 1970 | 최우수 오리지널 각본상 | 이지 라이더 | 후보 |
7. 출연 작품
원제
Tammy and the Doctor
The Victors
Lilith
The Young Lovers
The Wild Angels
The Trip
Histoires extraordinaires
Easy Rider
The Hired Hand
The Last Movie
Two People
Dirty Mary Crazy Larry
Open Season
Race with the Devil
Killer Force
Futureworld
Fighting Mad
Outlaw Blues
igh-Ballin
Wanda Nevada
The Hostage Tower
The Cannonball Run
Split Image
Dance of the Dwarfs
Spasms
A Reason to Live
Certain Fury
Mercenary Fighters
Fatal Mission
Family Express
Bodies, Rest & Motion
South Beach
Deadfall
Love and a .45
Nadja
Escape from L.A.
Grace of My Heart
'Ulees Gold''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남우주연상 수상
The Tempest
The Limey
South of Heaven, West of Hell
Thomas and the Magic Railroad
Second Skin
The Laramie Project
Capital City
The Heart Is Deceitful Above All Things
Supernova
Ghost Rider
Wild Hogs
3:10 to Yuma
Journey to the Center of the Earth
The Boondock Saints II: All Saints Day
The Trouble with Bliss
As Cool as I Am
The Harvest
The Runner
The Most Hated Woman in America
The Ballad of Lefty Brown
Boundaries
The Last Full Measure